현업과 상아탑

80년대초 전산실 근무당시 일본NEC 직원이 TV(?) 한대를 가져와
“이게 PC라는건데 10수년후에는 동내 수퍼마켓에도 이걸 쓸거다.”
라면서 자랑했다. 당시 같이근무한 프로그래머들 조차 “아니 그럼
프로그램은 누가 짜서 그걸 돌려 말도않되..”라고 했던 기억이난다.

이상직님삼보 컴퓨터 (2005/5/19 목)에서 발췌

당시에 전산실에서는 PC가 완전히 듣도보도못한 기술이었겠지만 지금 듣고 있는 시스템 엔지니어링 클래스에서 들은 바로는 그 당시 우리나라 연구기관에서도 IBM 칩과 PCDOS를 가져다가 PC를 개발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브로드밴드 보급률로 유명해진 것은 얼마되지 않았지만, 시스템 엔지니어링 클래스를 가르치시는 전길남 교수님은 1980년대부터 국내 인터넷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그 외에도 ETRI에 의한 TDX라든가 CDMA 기술의 개발도 우리나라에 보편화되기 훨씬 전부터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었다. 요즘 한창 얘기가 많이 나오는 3G나 DMB 기술도 마찬가지다. 전길남 교수님의 랩에서는 수년 후에나 보편화될 가능성이 있는 람다 네트워킹(lambda networking)을 연구하고 있단다.

회사에 다니다보면, 또는 기술에 관련된 웹사이트를 돌아다니다보면,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대의 기술들을 허겁지겁 따라가는 모양새가 문득 눈에 띈다. 반면에, 대학 연구실이나 연구소 사람들은 10년 후에나 보통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는 것(물론, 어떤 것들은 아예 볼 일이 없게되겠지만)을 연구한다.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이겠지만, 회사를 다니다가 복학해서 그 두가지 광경을 직접 보고 있노라니, 상아탑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살짝 부러운 생각도 든다. 단지, 자신의 생존 조건과 격리된 학문에 대한 어설픈 동경인가. 글쎄.

10년 후에나 보편화될 기술을 연구한다는 것은, 10년 후의 시스템의 초기조건을 형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초기조건에 민감하다. 자신의 밈(meme)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넓을 수록, 그리고 그 영향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될 수록 가치있어 보이는 것, 일변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현업에서도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란 법은 없다. 10년 단위는 아니더라도 신기술을 만들어내는 3-5년 단위의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대규모의 회사라면 쉽게 볼 수 있고, 그들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때로 어마어마하다. (예를 들어, 발매되지도 않은 XBOX 360, PS3에 대한 최근의 열풍을 보라.) 따라서, 현업과 상아탑이라는 이분법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기술을 소비하기만 한다. 특정 분야에서 어느 정도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생산한 기술을 소비하면서 또 다른 기술과 가치를 창출한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을 생산해낸다. 이러한 기술 생산과 소비의 (양적이기보다는) 질적인 차이에 따라 생산 위주의 계층으로부터 소비 위주의 계층이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현실에 적합할까.

그렇다면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난 이들 계층 중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디에 위치하기를 원하는가.

“현업과 상아탑”의 1개의 댓글

  1. 저는 이런 생각을 입사할 당시에 했었어요.. 랩 연구 활동을 거쳐 입사를 했기 때문이죠.
    당시엔 남이 만든 기술을 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고, 기술을 생산하는 일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 했었습니다. 기술을 소비해 현업에 적용시키는 일은 그닥 창조성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요. 책을 보고 익힐 수 있는 기술은 누구든 시간 만 투자하면 익힐 수 있는 기술이라고.
    지금은 글쎄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아무나 ‘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존경할 만큼의 경지에 다다른 개발자들도 분명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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