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적 민주주의와 매디슨적 민주주의 A Spectrum of Democracy

로버트 달(Robert A. Dahl)이 쓴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How Democratic Is the American Consistution)의 한국어판에 최장집 교수가 쓴 한국어판 서문 中:

필자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상충하는 모순적인 요소들의 좋은 결합과 이를 통한 동태적인 균형 위에서 존립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규범과 형식, 체제가 작동하는 규칙으로서의 절차적 측면과 체제의 작동이 창출하는 효과로서의 실질적 변화, 민중적 동력의 투입과 그 힘의 제도적 조절 간의 균형적 결합을 포함한다. 이 점에서 현실의 민주주의를 민중적 민주주의와 매디슨적 민주주의의 두 이념형 사이의 어떤 중간, 그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입지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시위자에 대한 경찰 폭력 Police Violence against Protestors

최근 며칠간 아프리카를 통해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의 현장 생중계를 보고있는데, 특히 어젯밤의 시위는 밤새 볼 수 밖에 없었다. 시위 참여자의 규모도 그동안의 시위 중 최대였으며, 그동안 간간이 사용하던 물대포를 밤새도록 사용했고, 근거리에서 시위자의 머리를 향해 물대포를 사용하는 바람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진압과정에서 주먹질과 발차기, 방패와 곤봉을 이용한 가격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아침 일찍 이명박 대통령이 시위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에는, 경찰 특공대까지 투입되기도 했다.

 

시위 현장의 실시간 보도는 오마이뉴스의 오마이TV, 진보신당의 칼라TV와 같은 진보 계열의 인터넷 미디어들과 아프리카 등을 통한 개인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졌다. 아프리카 진보신당 방송국를 통해 마이크를 들고 시위 현장을 취재하던 진중권 교수도 전경에게 폭행을 당하고 연행된 상태다. 개인들이 찍은 영상 과 사진들 덕분에 시위 진압 과정에서의 폭력 –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거나, 발로 차거나 방패로 가격하거나, 곤봉을 사용하는 장면들은 모두 기록되었다. MBC에서는 6월 1일 새벽 1시경 시위 현장을 속보로 편성(1부, 2부, 3부, 4부)했는데, 화면에서 시민과 경찰의 충돌 장면은 모두 걸러내고, 시위가 격렬해지는 원인도 시민의 탓이라는 뉘앙스를 준다. 6월 1일 오전 6시에 MBC에서 방영한  ‘뉴스투데이’에서는 경찰의 살수 장면과 경찰이 시위자를 발로 차고 방패로 가격하며 진압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1부, 2부, 3부, 4부) 하지만, MBC의 ‘뉴스와 경제’에서는 과격한 장면들은 걸러내진 것으로 보인다.

Someone to inspire us

“If our job teaches us anything, it’s that we don’t know what the next President’s gonna face. And if we choose someone with vision, someone with guts, someone with gravitas, who’s connected to other people’s lives, and cares about making them better; if we choose someone to inspire us, then we’ll be able to face what comes our way and achieve things we can’t imagine yet. Instead of telling people who’s the most qualified, instead of telling people who’s got the better ideas, let’s make it obvious. It’s going to be hard.” – Toby Ziegler, West Wing Season 4 Episode 1: ’20 Hours in America’

Demonstration

Episode 1.

2005년 회사에서 일하다가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 나는 예전에 내가 학생으로서 권리를 주장하던 것들을 학교로 떠나 다른 위치에 있을 때는 완전히 까맣게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회사에서는 노동자로서의 권리에만 관심이 있고 그것을 찾는데에만 급급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2005년 초여름에 고등학생들이 교육 문제에 관한 몇번의 시위를 한 적이 있다. 당시에 듣던 역사 강의의 교수님은, 학생은 공부를 해야하지 시위를 해서는 안된다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몇가지 부연 설명 (학생이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환경도 중요하다는 식의 얘기)도 하신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학생 시위 자체에 대해서는 바람직하게 여기지는 않으시는 것 같았다. 아무개가 그런 소리를 했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역사 교수님께서 그런 얘기를 하신 것은 어쩐지 실망스러웠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자신의 권리를 대변해줄 수는 없다. 학생이 공부를 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바람직한 일인 것은 당연하나, 바로 학생만이 학생을 대표하고 학생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조력자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력자들의 주장은 수많은 주장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한다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모아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오롯히 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영어 단어 몇개 수학 공식 몇개보다 훨씬 삶에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나 사회적 약자 중 하나인 학생들의 목소리는 그들은 자신의 권리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동안 무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내게는 학생들의 시위가 그들의 정당한 권리이면서도 그들의 처절한 현실로 비춰진다.

Episode 2.

2006년 늦가을 한창 FTA 반대 농민 시위의 분위기가 격렬해가던 때, 방화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당연히 언론 기사들은 과격 시위를 비판하는 논조 일색이었고 짜증내하는 시민들의 의견을 곁들였다. 점심 식사 시간에 사람들과 그러한 소식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동료 한명이 한 말은 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 정도면 발포해야하는 거 아냐?”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하다 못해 영화 Bloody Sunday (2002)를 본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일단은 폭력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이, 또는 폭력에는 무조건 폭력으로 대응해야한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를 전범으로 만드는 것이다.

Communication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를 이끌어오면서 참 어려웠던 것은 소통의 문제”라며 “대화가 안되더라도 타협이 안되더라도 말귀는 서로 통해야 되지 않느냐. 말귀가 서로 안통하는 것이 요즘 너무 많다 ”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정책기획위원회 위원들과 가진 오찬간담회에서 저는 대화를 말하지만 사람들에게 그것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같은 내용은 2일 국정홍보비서관실에서 당시 노대통령의 발언을 정리해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글을 통해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이어 “그만큼 대화와 타협이 어렵다”며 “그러나 그 대신 단결의 한 요소인 희생과 헌신, 그것은 하겠다”고 말했다.

‘노대통령 “한국사회, 말귀 안 통해 참 어렵다’, 조선일보

정혜신

‘김대중 죽이기’의 서평을 쓰느라 책을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아직 우리 언론은 정치인들의 평가에 정신분석학을 도입하지는 않고 있다. 아니 다행이라고 볼 일은 아니다. 우리 언론은 정치보도에 있어서 아예 정신분석학의 흉내도 내지 않으면서 추리소설을 쓰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 특히 김대중에 관한 보도가 그러하다. (김대중 죽이기, 강준만, 개마고원, 1995)

강준만 씨가 아이디어를 줬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불행히도 (?) 정혜신 씨는 정치인들의 평가에 정신분석학을 도입했다. 생각난 김에 정혜신 씨에 대한 얘기를 약간 해보자.

정신분석학은 ‘환자는 항상 옳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의식 수준에서는 엉뚱하고 비논리적인 환자의 말이나 행동들도 무의식 수준에서는 그 사람의 핵심동기를 드러내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나타난 말만으로 헛소리라고 무가치하게 여겨서는 안된다. 이것은 마케팅에서 말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말과는 조금 다르다. 시장에서 말하는 고객만족은 지극히 의식적 수준의 개념인데 반해 정신분석학은 철저하게 대상의 무의식 차원에 주목한다. 의도를 가진 특정집단이나 개인에 대해서는 명징한 의식의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봐야 하지만 민심이란 본질적으로 민중의 무의식이 투사된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민심은 언제나 옳다, 고 나는 생각한다. (정신분석학으로 본 노 대통령, 정혜신, 한겨레)

정신분석학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환자는 항상 옳다’는 명제가 옳다고 가정해보자. 환자의 무의식이 드러낸다는 핵심동기는 언제나 헛소리로 들릴 뿐이다.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자의 일일테다. 민심에 대한 정혜신 씨의 정치철학도 옳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헛소리로 들리는 민심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위의 얘기도 어디까지나 너그럽게 모든 것이 옳다는 가정 아래서의 얘기다. 정혜신 씨가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뭔가? 민심은 (말그대로) 옳으므로 대통령은 이를 따라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정치철학이자 정치적 의견이다. 특히나, 연정을 둘러싼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일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펼치는데 정혜신 씨의 정신분석학은, 의식과 무의식 운운은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그가 동원한 정신분석학은 얼마나 과학적 정합성을 가지고 적용되었는가? 그것은 적합한가?

정혜신 씨의 정치적 의견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정신분석학 운운은 봐줄 수가 없다. 일종의 ‘지적 사기’다.

Update: 이상한 모자님의 한겨레의 정신분석학도 읽어보자.

이 경우의 ‘정신분석학으로 본’ 이란 수사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적 경향에 대해 ‘개인적’ 조언을 하겠다는 알리바이에 불과한 것이다.

정혜신의 '천하의 유시민을 어찌 당하랴만은'

정혜신의 ‘천하의 유시민을 어찌 당하랴만은’

한겨레에서 정신분석을 통해 인물비평을 하는 칼럼을 쓰고 있고, 같은 내용으로 책도 낸 정혜신 씨가 오마이뉴스에서도 칼럼을 쓰는 모양이다.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는데 정신분석 운운도 코미디지만, 최근에는 유시민 의원에 대한 비평 ‘천하의 유시민을 어찌 당하랴만은’ 이란 글을 썼는데 내용이 가관이다.

‘지적 권위주의’란 매사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원래 권위주의란 게 수평관계보다 수직적 관계를 축으로 이루어진다. 논리적 설득의 측면에서는 유시민도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논리를 내 논리에 종속시켜야 속이 후련한 것처럼 보인다.

‘지적 권위주의’ 성향이 있는 이들에게 ‘앎(知)’은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다. 매사 ‘너 그거 알아?’ 하며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따지기 좋아하고 상대의 이해력을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지적 권위주의’는 ‘앎’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려는 경향성이다.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므로 대개의 경우 합리적이지만 권위주의적 색채가 짙어지면 제3자를 무시하거나 냉소적으로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신의 ‘앎’을 최종 결론으로 미리 단정하고 논의를 시작하기 때문에 토론이 아닌 설득이 된다. 일방적, 배타적 논의다.

정혜신 씨가 ‘지적 권위주의’란 단어를 대체 왜 끌어왔는지 모르겠다. 정혜신 씨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한가지다. 유시민은 사실과 논리적 정합성에 의존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주장만 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럼, 정혜신 씨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시민이 ‘논리적’이라는 것이 문제인가, ‘권위적’이라는 것이 문제인가? 유시민은 비논리적이라고 느끼더라도 적당히 자신의 주장을 굽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해줘라?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정말로 그런 것 같다.

논리성이 실체적 진실을 알려주는 알파와 오메가도 아니고 사람을 설득하는 요소의 전부도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향력의 90%는 언어적 요소가 아닌 비언어적 요소에 의한 것이다. 말의 내용 그자체 보다도 말하는 사람의 얼굴표정, 말의 억양, 손짓, 몸짓 등의 비언어적인 요소를 통해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순수하고 열정적인지, 또는 진실한지 등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게 되며 그것에 의해서 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부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논리성이 알파와 오메가는 아니거니와 비논리성은 더더욱 그렇다.

논리성은 나쁜가?

정혜신 씨의 말에 동의한다고 가정하고, 유시민은 권위적인 면이 많다고 치자. 더해서, 유시민의 권위주의는 그의 지적인 자신감에서 나온다고 치자. 하지만, “지적 권위주의”라는 말로 포장해서 그의 논리성과 권위주의를 포장해서 함께 비판해서는 안된다. 논리성은 정치판에 부족한 미덕이며, 그러한 미덕의 부족은 정치에 대한 불신을 낳게 마련이다. 비판하려거든 그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되, 논리성을 비판하지 말라. 아니면 차라리, 유시민은 비논리적이라고 비판하라. 우습게도 ‘정치적 이슈’의 중심은 항상 각 당의 대변인들의 선정적인 한마디가 되는 현실보다, 그 해롭다는 유시민 4명이 나와서 토론한 내용이 국민적 의제로 설정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정치에는 훨씬 이로울 것이다. 나는 이 추측이 옳음을 “무의식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정혜신 씨도 예로 든 100분 토론에 등장한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 의 “경제가 어려운데”의 고집을 보자. 그건 “비논리적-경제적 권위주의”라도 되는가? 비이성적인(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권위주의가 만연한 정치판에서 그나마 지적 권위주의는 양반이다.

정치가에게 권위주의는 나쁜가?

위에서 한나라당의 의원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정치가에게 있어서, 권위주의는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치가가 대표하는 이상이나 가치는 그에게 모든 다른 가치를 배제하는 제1의 목표가 될 수 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그의 정치적 행동은 외부에는 어떤 형태로든 권위주의로 비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지식인들의 ‘지적 권위주의’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지식인들이 ‘내가 졸라 맞아’라고 하는 것과 정치인들이 ‘내가 졸라 맞아’하는 것은 다른 성격의 것이라는 얘기다.

역시 위의 100분 토론에서 누구 하나 자신의 의견을 변경한 사람이 있는가? 정치적 견해가 대표성을 지닌 한, 논리를 통한 설득이든 지속적인 무시든 – 무슨 수단을 이용하든 기본적으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권위주의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오랜 시간에 걸친 타협과 설득을 통한 정치적 견해의 변화는 100분 토론이나 단발의 연설에서는 표현될 수가 없다.

유시민은 정말로 권위주의적인가?

유시민이 특출나게 똑똑해서 권위주의적이고, 또 그래서 유시민은 항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걸까? 즉, 그가 권위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그의 논리성일까? 혹, 유시민이 권위주의적이라는 주장은 유시민의 ‘권위’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법일 뿐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권위’의 원인은 실제로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유시민 만큼 말 잘하고 논리적인 사람은 많다. 다만 그런 사람이 정치판에 적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그래서, 유시민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적어도 서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유시민의 토론 상대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다시 말하면, 그가 권위주의적으로 비치는 것은 그의 광채, 즉 권위를 덜어줄만한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정혜신 칼럼의 제목 자체가 이러한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천하의 유시민’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정신분석과 비논리성을 강조하는 정혜신씨가 어떻게 짓밟는단 말인가? 하지만, 유시민 정도의 논리성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짓밟을 수 있다고 본다.

만약에 정치판과 정치가들을 뽑아줄 국민들에게 그러한 자각을 만들기 위해서 유시민의 ‘계몽’이 계속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옹호할 것이다.

강정구 교수의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

강정구 교수의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

2005년 7월 27일 강정구 교수는 데일리 서프라이즈‘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컬럼을 실었다. 이 컬럼의 내용은 맥아더 동상 철거에 대한 두 집단의 충돌이 폭력과 이념 분쟁으로 일관하는 당시의 상황을 비판하고 맥아더 동상 철거에 대한 나름대로 합리적인 주장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는, 맥아더가 분단의 원인을 제공했으며, 전쟁의 주도자이며, 전시 민간인 학살의 주범이라는 근거를 들어, 맥아더가 생명의 은인이라거나 은혜를 갚아야한다는 논리를 비판하고 있다. 아래의 내용을 읽기 전에 강정구 교수의 컬럼 원문을 직접 읽어보기를 권장한다.

이에 대한 보수언론과 보수단체의 반응은 극단적이었다. 조선일보의 사설 강 교수는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품에 안기라에서는 강정구 교수가 적화통일을 옹호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는 27일 ‘6.25전쟁은 통일전쟁이자 內戰내전이었다’며 ‘이 집안싸움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에 끝났을 것이고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親盧친노 인터넷매체 ‘데일리 서프라이즈’에 기고한 칼럼에서 ‘전쟁 때문에 생명을 박탈당한 400만명 대부분에게 미국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원수’라며 ‘전쟁狂광 맥아더의 동상도 함께 역사 속으로 던져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2001년 8-15 행사 때 북한의 김일성 生家생가 만경대를 방문해 방명록에 ‘만경대정신 계승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는 글을 남겼던 사람이다. 강 교수의 글 속엔 6-25전쟁에서 北북이 승리해 ‘赤化적화통일’이 성사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절절이 배 나온다.

조선일보 고문 김대중씨의 컬럼 ‘강정구 발언’이 의미하는 것에서는 한술 더 떠서 강정구 교수를 북의 지령을 받은 공작원 정도로 취급한다.

북(北)의 김정일 정권은 이제 대남(對南)전선에서 어떤 자신감을 얻은 듯 하다. 최근 한국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맥아더동상 철거운동과 동국대 강정구씨의 ‘통일전쟁’ 운운의 발언은 건국 이래 한국의 반공(反共)에 눌려 지하(地下)에 머물렀던 NL세력이 마침내 지상(地上)으로 표출하는 신호탄을 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다?

보수언론과 보수단체가 특히 비판하는 부분은 6.25전쟁이 통일전쟁이었다는 대목이다. ‘통일전쟁’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모호하다. 통일을 결과로 하는 전쟁을 의미하는가,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의미하는가. 하지만, 그 단어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 그들이 부여하는 의미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통일전쟁에 담겨진 2차적인 의미는 ‘통일을 할만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주체에 의한 통일을 결과 또는 목적으로 하는 전쟁’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아마도 강교수는 의도하지 않았을, 이렇게 쓸데없이 복잡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적어도 합리적인 논쟁을 위한 태도는 아니다. 솔직히, 이념 논쟁을 일으키는 자들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생각없이 그 단어만 사용하더라도 그들의 덫에 걸리는 것이다.

강교수가 의도한 그 단어의 진짜 의미가 무엇이든, 강교수의 얘기가 옳은가의 여부의 판단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이른바 ‘통일전쟁’에 대한 보수진영의 태도를 살펴보자.

우선, 진중권의 창과 방패에 올라온 진중권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via 프레시안)

"한국 역사상 통일을 위해서 전쟁을 결심했던 사람으로 두 김씨가 있으니 김유신과 김일성이다."

6.25가 김유신의 삼국통일에 비견할 만한 통일전쟁이라는 얘기죠? 이 말은 누가 했을까요? 정답은, 월간조선 조갑제 전 사장입니다. 의 말입니다. 대표적 우익인사인 이 분은 김일성도 한 통일전쟁의 결심을, 왜 대한민국은 하지 못하냐고 질타하더군요. 이렇게 6.25가 통일전쟁이었다는 주장도, 조갑제씨처럼 전쟁을 선동하는 맥락에서 하면 괜찮고, 강정구씨처럼 역사학적 주장으로 제기하면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 그게 국보법이 지배하는 이상한 나라의 논리입니다.

진중권 씨가 언급한 월간조선 1994년 3월호 조갑제 씨의 논평 외에도 월간조선 2000년 6월호에 실린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의 시론에도 비슷한 얘기가 실려있다.

6-25는 우선 金日成의 통일전쟁이었다

한국 쪽에는 대응火器조차 없는 T34 전차를 앞세워,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시키는 미니 전격전을 벌일 만큼 그 준비는 좋았다. 그러나 金日成은 미국의 개입을 예상치 못했고, 그 미국은 중공의 개입을 예상치 못했다. 전쟁은 밑에다 불칼을 단 롤러로 남북 3000리를 1년 남짓한 사이에 한두 번 아래위로 밀어대는 기동전이었고, 휴전 얘기가 나오고서부터 2년간은 전선이 38선 주변에 교착된, 주로 陣地戰(진지전)이었다.

2001년 9월 28일 건군 53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 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도 비슷한 논지의 얘기를 했다가, 한나라당의 공격을 받은바 있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세 번의 통일 시도가 있었습니다. 신라의 통일과 고려의 통일, 이 두 번은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인 6.25 사변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번 모두가 무력에 의한 통일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네 번째의 통일 시도는 결코 무력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야합니다. 지금은 남북이 엄청난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민족의 안전을 위해서나 장래의 번영을 위해서나 반드시 평화통일에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이 연설에 관한 중앙일보의 기사.

이에 대해 한나라당 권철현(權哲賢)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엄연히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에 의한 남침(南侵)을 ‘통일시도’ 로 평가하다니 대통령의 사상과 역사인식을 의심치 않을 수 없다" 고 비난했다. 權대변인은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호국영령들과 참전용사들이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시도’ 를 막은 ‘반통일세력’ 이란 말인가" 라며 "金대통령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을 한 데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하고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이재오(李在五)총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발언"이라며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강력히 따질 것" 이라고 말했다. (from 중앙일보)

2000년과 2001년 사이에 화성인의 침공이라도 있었는가?

국가보안법에 의한 강정구 교수 사법처리

조선일보가 강정구 교수를 조선일보 입사시험에 낙방한 루저로 모는 찌질이짓을 하는 가운데, 경찰당국은 강정구 교수를 국가보안법으로 사법처리 방침을 발표했다.

급기야 보수 세력의 반발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자유개척청년단 등 23개 보수 시민단체 회원 820명이 최근 "강 교수의 글은 북한을 찬양-고무해 국가 변란을 선전-선동하고 국헌 문란을 목적으로 내란을 선동한 것"이라며 서울중앙지검과 서울경찰청에 고발장을 제출한 것.

고발장을 접수한 수사당국이 강 교수의 글 중 관심을 갖는 대목은 "6.25 전쟁은 후삼국 시대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모두 삼한 통일의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 했듯이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수사 당국이 이 대목을 특별히 주목한 것은 북한에 대한 찬양-고무를 금지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제7조에 저촉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수사 당국인 서울경찰청은 지난 24일 사법처리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조사 초점은 국가보안법 7조(고무-찬양) 위반 여부"라고 밝혔다. (from 프레시안)

6.25가 통일전쟁이라는 말 중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맥아더 동상 철거에 대한 강정구 교수의 모든 논리가 설득력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강정구 교수의 논리는 그 논리가 반박됨으로써 힘을 잃은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세력들은 그 논리를 얘기한 사람, 바로 강정구 교수라는 사람 자체를 반박함으로써 그의 논리도 힘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다. 맥아더 동상 철거에 관한 합리적인 논의를 시작해보자고 했던 글이 보수언론에 의해 조그만 꼬투리를 잡혀서 국가보안법의 도마에까지 아직도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Update 2005/10/16: 강정구 교수에 대한 비판에 대한 강정구 교수의 반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