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기술’이란 책을 읽지도 않고 서평을 쓰는 실험.
뭔가 의도를 담아내는 재치가 부족해 보인다.
글쓴이: Cestlavie (이방인) [writers/BlueEyes]
날 짜: 2002년 11월 25일 월요일 04:21:38
제 목: 유혹의 기술
나의 삶이 얼마나 거짓된 삶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아이 재미있어라. 낄낄. 참고로 writers/cybgira의 동제목의 글에 대한 리.
남의 보드를 어지럽히기는 미안하여 내 보드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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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유혹의 ‘필요’가 근대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때부터일까 근대의 어느 시점에서부터일지, 아니면 훨씬 더 오래전부터일지,
유혹은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유혹의 역사는 그것이 가능한 사회에서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분명히 기록되어
전해져왔으며, 아마도 탄복과 외경의 의미가 아닐지. (두려움과 비난의 형태로만
나타난다 하더라도)
인간사에 흔한 유혹의 시나리오에서 유혹하는 쪽은 유혹당하는 쪽에 비해서 뭔가
뛰어난 조건-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고 (그 뛰어난 조건이 아무리 원천적이고
인간 본능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뛰어난 조건이 미덕인 것으로
생각해야할 터인데, 유혹과 유혹의 기술과 그것을 위한 조건들은 모두
뭉뚱거려져서 미덕으로 생각되고 있는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유혹당하는 쪽보다는 유혹하는 쪽을 원한다. 심지어 유혹을
경멸하면서도 말이다. 합리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은 불합리함의 점철이자
결정판이지만, 그러한 불합리성을 어떻게든 극복해낸 사람이라면 유혹에 있어서
좀 더 능수능란할 수 있을 것이고 유혹이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살인에 대해서 자기합리화를 잘할 수 있는 병사가 더욱 능력있는 병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혹에 대한 합리성의 문제는 사소한 것에 불과하고,
합리성의 문제와 유혹의 기술 자체, 그리고 그 기술을 위한 능력의 세가지
중에 유혹의 실행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유혹을 위한 조건,
즉 능력의 존재여부일 것이다.
이 책은 유혹을 실행하기 위한 이러한 세가지 조건 중 가장 덜 중요하지도 가장
중요하지도 않은 유혹의 기술 즉, 방법론에 관한 책이다. 유혹의 기술에 관한한
이 책은 상당히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최고의 매력이라고 생각되는 점은
아무래도 유혹의 기술을 몇 가지의 유형으로 분리하고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설명하기 힘든 인간간의 문제에 대해서, 역사는 가장 합리적인 설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덤으로 독자들은 유혹의 역사에서 조명을 받는 주인공들을 통해 어느
정도의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막상 유혹의 실행에 있어서 난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자신의 능력의 조건에 대해서 만족스러울 만큼 잘
알고 있지조차도 못하기 때문이다. 글쎄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다음과 같은
제목의 책을 기다리지 않을까?
‘유혹, 세라비만큼만 하기’
‘유혹자를 위한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