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신의 ‘천하의 유시민을 어찌 당하랴만은’
한겨레에서 정신분석을 통해 인물비평을 하는 칼럼을 쓰고 있고, 같은 내용으로 책도 낸 정혜신 씨가 오마이뉴스에서도 칼럼을 쓰는 모양이다.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는데 정신분석 운운도 코미디지만, 최근에는 유시민 의원에 대한 비평 ‘천하의 유시민을 어찌 당하랴만은’ 이란 글을 썼는데 내용이 가관이다.
‘지적 권위주의’란 매사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원래 권위주의란 게 수평관계보다 수직적 관계를 축으로 이루어진다. 논리적 설득의 측면에서는 유시민도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논리를 내 논리에 종속시켜야 속이 후련한 것처럼 보인다.
‘지적 권위주의’ 성향이 있는 이들에게 ‘앎(知)’은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다. 매사 ‘너 그거 알아?’ 하며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따지기 좋아하고 상대의 이해력을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지적 권위주의’는 ‘앎’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려는 경향성이다.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므로 대개의 경우 합리적이지만 권위주의적 색채가 짙어지면 제3자를 무시하거나 냉소적으로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신의 ‘앎’을 최종 결론으로 미리 단정하고 논의를 시작하기 때문에 토론이 아닌 설득이 된다. 일방적, 배타적 논의다.
정혜신 씨가 ‘지적 권위주의’란 단어를 대체 왜 끌어왔는지 모르겠다. 정혜신 씨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한가지다. 유시민은 사실과 논리적 정합성에 의존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주장만 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럼, 정혜신 씨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시민이 ‘논리적’이라는 것이 문제인가, ‘권위적’이라는 것이 문제인가? 유시민은 비논리적이라고 느끼더라도 적당히 자신의 주장을 굽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해줘라?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정말로 그런 것 같다.
논리성이 실체적 진실을 알려주는 알파와 오메가도 아니고 사람을 설득하는 요소의 전부도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향력의 90%는 언어적 요소가 아닌 비언어적 요소에 의한 것이다. 말의 내용 그자체 보다도 말하는 사람의 얼굴표정, 말의 억양, 손짓, 몸짓 등의 비언어적인 요소를 통해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순수하고 열정적인지, 또는 진실한지 등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게 되며 그것에 의해서 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부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논리성이 알파와 오메가는 아니거니와 비논리성은 더더욱 그렇다.
논리성은 나쁜가?
정혜신 씨의 말에 동의한다고 가정하고, 유시민은 권위적인 면이 많다고 치자. 더해서, 유시민의 권위주의는 그의 지적인 자신감에서 나온다고 치자. 하지만, “지적 권위주의”라는 말로 포장해서 그의 논리성과 권위주의를 포장해서 함께 비판해서는 안된다. 논리성은 정치판에 부족한 미덕이며, 그러한 미덕의 부족은 정치에 대한 불신을 낳게 마련이다. 비판하려거든 그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되, 논리성을 비판하지 말라. 아니면 차라리, 유시민은 비논리적이라고 비판하라. 우습게도 ‘정치적 이슈’의 중심은 항상 각 당의 대변인들의 선정적인 한마디가 되는 현실보다, 그 해롭다는 유시민 4명이 나와서 토론한 내용이 국민적 의제로 설정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정치에는 훨씬 이로울 것이다. 나는 이 추측이 옳음을 “무의식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정혜신 씨도 예로 든 100분 토론에 등장한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 의 “경제가 어려운데”의 고집을 보자. 그건 “비논리적-경제적 권위주의”라도 되는가? 비이성적인(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권위주의가 만연한 정치판에서 그나마 지적 권위주의는 양반이다.
정치가에게 권위주의는 나쁜가?
위에서 한나라당의 의원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정치가에게 있어서, 권위주의는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치가가 대표하는 이상이나 가치는 그에게 모든 다른 가치를 배제하는 제1의 목표가 될 수 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그의 정치적 행동은 외부에는 어떤 형태로든 권위주의로 비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지식인들의 ‘지적 권위주의’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지식인들이 ‘내가 졸라 맞아’라고 하는 것과 정치인들이 ‘내가 졸라 맞아’하는 것은 다른 성격의 것이라는 얘기다.
역시 위의 100분 토론에서 누구 하나 자신의 의견을 변경한 사람이 있는가? 정치적 견해가 대표성을 지닌 한, 논리를 통한 설득이든 지속적인 무시든 – 무슨 수단을 이용하든 기본적으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권위주의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오랜 시간에 걸친 타협과 설득을 통한 정치적 견해의 변화는 100분 토론이나 단발의 연설에서는 표현될 수가 없다.
유시민은 정말로 권위주의적인가?
유시민이 특출나게 똑똑해서 권위주의적이고, 또 그래서 유시민은 항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걸까? 즉, 그가 권위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그의 논리성일까? 혹, 유시민이 권위주의적이라는 주장은 유시민의 ‘권위’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법일 뿐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권위’의 원인은 실제로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유시민 만큼 말 잘하고 논리적인 사람은 많다. 다만 그런 사람이 정치판에 적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그래서, 유시민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적어도 서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유시민의 토론 상대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다시 말하면, 그가 권위주의적으로 비치는 것은 그의 광채, 즉 권위를 덜어줄만한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정혜신 칼럼의 제목 자체가 이러한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천하의 유시민’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정신분석과 비논리성을 강조하는 정혜신씨가 어떻게 짓밟는단 말인가? 하지만, 유시민 정도의 논리성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짓밟을 수 있다고 본다.
만약에 정치판과 정치가들을 뽑아줄 국민들에게 그러한 자각을 만들기 위해서 유시민의 ‘계몽’이 계속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옹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