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문학동네, 2004
읽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작품 개개에 대한 얘기는 다음번으로 미루자. 대신, 책을 읽을 당시에 끄적거린 노트를 들여다보자.
무진은 어디에 있는 도시인가? 안개가 많은 도시라는 것을 볼 때, 바닷가 근처거나 호수가 있는 내륙지방(강원도)의 느낌이 난다. 읽다보면, 호남지방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든다. 어디에 있는 도시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점이 중요한 것인가? 도시로부터의 도피처? 실락원?
영화 "생활의 발견"와의 관련성. 지방 도시에서 만난 여선생과의 정사라는 스토리라인. "우리 서로 솔직해지기로 해요"라는 대사.
서울과 무진의 공간적 대비. 서울은 이성이 지배하는 공간. 무진은 욕망이 지배하는 공간. 자의식과 무의식. 욕망(비이성)에의 옹호? 주인공의 이중성 자체도 비이성?
부조리극. Camus. 타인의 속물적 행동에 대한 비판과 주인공 자신의 속물적 행동.
사실 이 노트의 마지막 줄에 있는 ‘부조리극’이라는 단어가, 이 소설집 전체에 대한 내 느낌을 대면해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품마다 부조리의 현실, 주인공과 부조리와의 관계는 제각기 다르고, 주인공이 그러한 부조리에 대처하는 방법도 다르지만, 공통된 것은 바로 부조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나는 까뮈를 좋아한다.
그래도 전집이니까 붙어있는 작가 연표를 보고서 알아낸 것은 이 소설집에 있는 작품들은 김승옥 씨가 스무살 남짓하던 시절에 쓴 것들이란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부조리를 발견해내는 것은 이십대의 정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대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또는 정신적인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치자면, 왜, 삼십대, 사십대는 아닌가. 이십대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러한 정신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김승옥 씨의 삶 자체가 이러한 물음의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치열한 작품들을 썼던 작가는 서른이 끝나갈 무렵 ‘광주사태’로 의욕을 잃고 절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내 영안이 열"렸다며 이제 "하나님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소설을 쓰겠다고 한다. 그의 치열한 정신을 읽은 나로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것이 삶일런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