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 소설은 잘 읽지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이런 저런 소설은 읽지 않아야겠다고 작정할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이유를 찾아본다면, 내가 살을 접하며 살고 있는 현실과 너무 가까운 것은, 날생선을 먹는 것처럼 비린내가 난달까. 나와 같은 언어로 말을 하고, 나와 비슷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일부러 스스로를 지목하여 촘촘히 들여다보게 만들어서 불편하다. (“불편하다”는, 김영하의 소설들을 읽으며, 그 유용함을 발견한 표현) 기왕이면, 어느 먼 왕국의 이야기가 좋고, 수억광년 떨어진 외딴 별의 이야기가 좋다. “킬킬, 당신도 결국 이딴 종류의 인간일 뿐인거 아냐?”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원래 인간이란게 이런거라네.”라고 하는 소설이 좋다.
본의든 아니든 “문학의 이해”를 수강했던 것은, 내가 복학했던 탓이고, 본의든 아니든, 본의든 아니든 한국 작가의 소설을 읽어야 했던 것은, 내가 숙제를 하기로 마음먹었던 탓이다. 본의든 아니든 김영하를 집어든 것은, 그 사람의 책이 내겐 재미있어 보였던 탓이다.
뭐, 대단찮은 취향을 굳이 지키려고 끙끙댈 필요가 있나, 책 한 권 읽는 것에 무슨 대단한 이유가 필요한가. 사람이 그리워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가볍게 꺼내들었다. 대체 왜 “우등”이라고 이름을 붙이는지 이해할 수 없는, 덜덜 떨리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은 탓에, 친구와의 만남은 좀 피곤했지만, 책 자체는 재미있었다. 상당히 재미있었다. 대강 때려맞춰봐도, 이 작가 나랑 코드가 맞고, 이야기를 잘한다, 다른 책도 한번 사서 읽어볼까. 책 맨 뒤에 있는, 짤막한 평론은, 당연하고 대단찮은 이야기를, 굉장히 어렵게 써놓은 것 같다. 이게 뭐야. 이럴거면 그냥 붙이지말지. 내가 “문외한”이라서 그런가?
첫번째로 나오는 소설이 (얘기안했던가? 이건 단편소설집이다.) “사진관 살인 사건”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추리소설이라는 감이온다. 실제로 추리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다. 중간쯤 가면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김전일 만화였다면 “범인은 바로 이 중에 있다!”라고 외치며, 의외의 인물을 지목해야하는 시점에서, 그만 시시해져버린다. 거기가 아니라, 이어지는 수사관의 후일담이 나오는 지점이 바로 독자들이 무릎을 탁쳐야하는 지점이다. 연애를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특히 짝사랑인지 사랑인지 모를 중간쯤의 연애을 해본 사람은, 이 단편 전체에 흐르는 두 용의자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에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졸졸 흐르던 감정이 결말에 가서는 엄청난 양으로 증폭되어 쏟아져나온다. 그만큼 긴 여운. 그런데, 그것은 수사관 얘기처럼, 신문에 흔하디흔하게 오르내리는 추잡한 감정 놀이였을 뿐인데. 그 두사람에게는 또는 독자에게는 그만큼 드라마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연애담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거나, 술자리 선배에게 얘기를 한번 해봐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흔하디흔하고 너절한 연애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보면, 탈영한 군인에게 인생 강좌를 해주며, 사랑보다 인생이 중요하지 않냐고 한다. 자기네들은 사랑가지고 울고 불고 지지고 볶으면서 말이다. 지하철에서 토한 여자를 여관에 업어다 줄만큼 엽기적이고, 맞선 보는 자리에서 헤어진 여자친구를 만날 정도로 드라마틱하지 않으면, 그런 생각은 절대 않는게 좋을 것이다. 결국, 치정살인사건이 아니었다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치정살인사건이어도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는 것이 우리들이 하는 감정 놀이의 진수다.
“흡혈귀”에 나오는 흡혈귀는 멋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사랑을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하고, 덤으로 아는 것도 많다. 한가지라도 빠졌으면 덜 멋있었을 것이다. 내 이상형이라고 해도 나쁘지않다. “정말로 그런 멋있는 사람이 있는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물음에, “별거 아냐, 그 사람, 흡혈귀라서 그런거아냐?”라는 느낌이다. 숨겨진 한마디는, “그런데, 뭐 어쩌라고, 제 멋대로 살겠다는데.” 정도일까.
“피뢰침”은 벼락을 맞아본 사람의 모임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진짜로 그런 동호회가 있나하고 찾아봤지만, 그 동호회 이름인 “Adad”가 고대 오리엔트의 뇌신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냈다. 주인공이 그 동호회의 회장인 J에게 대체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 다시 벼락을 맞으려하는지 묻자, J는 그 이유를 예술적 희열에 비교한다. 간단하게, 예술적/종교적 희열을 벼락 맞기의 희열로 비유한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나처럼 예술이나 종교와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명화을 그리면서 느끼는 희열이 뭔지, 신을 섬기면서 느끼는 희열이 뭔지를 말로, 글로 설명해봤자 이해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발기한 피뢰침으로는 설명이 되는 것 같다.
“당신의 나무”는 앙코르 사원으로의 여행과, 히스테리아를 앓는 여성과의 연애를 소재로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히스테리아라는 단어에는 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비정상 자체가 정상인의 권력이 낳은 횡포라는 인식도 작용하고 있고, 요즘 시대에 히스테리아에 대해서 좀 알고 있으면 유식하게 보이는 것도 있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히스테리아를 앓는 여성을 사랑한 적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런 시절의 어느쯤엔가는 “당신의 나무”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고, 이성으로 설득하려고도 해보았고, 감정을 내세워 달래보기도하고, 정신의학 입문서나 프로이트도 읽어보았다. 결론은, 난 “당신의 나무”가 될만한 능력따위는 애초부터 없다는 것이었고,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러한 포기 자체가 그 점을 입증하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에게 “당신의 나무”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당신의 나무”인가? 글쎄, 별로. 소설에서처럼 앙코르에라도 가봐야 깨달음을 얻을려나.
친구들이 이 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읽어볼 만 하긴 하다” 정도가 될 것 같다. 덧붙인다면, “매우 재미있다. 김영하를 한권 정도 더 사볼 생각이다.”가 될 것 같다. 한가지 아이러니는, “친구”는 보통 접근성이나 신뢰의 정도에 의해서 결정되고, 정작 책을 추천해줄 때 중요한 기준이 되는 취향에 의해서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글은 별로 쓸모가 없는 것 같다.
이 의 원작이라고 하던 걸요. 영화는 김영하의 소설 두 개인가 섞어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해요. 전 한국 소설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은 잘 안 나는게 김영하 씨는 미남자라 좋아합니다. :-)
이런 ”가 모두 사라지네요. ‘사진관 살인 사건’이 영화 ‘주홍글씨’의 모티브가 되었단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건데……
ps. 모 양이 알려줬습니다. 하하.
글이 참 맛깔나네요. 비슷한 취향에 반가워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저도 우연히 잡은 책 한 권으로 김영하 작가의 책을 한권씩 모으는 중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