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배경으로 한, 이순신의 삶을 그린 일종의 전기 소설이자 역사 소설이다. 줄곧 1인칭 시점으로 그려져있고, 이순신 자신이 한 일들을 나열해 놓은 식이 많아서, 읽는 동안 딱딱하다는 느낌도 들었고, 마치 이순신 자신이 쓴 일기 – “난중일기”의 현대어 번역판을 읽는 느낌이었다. 리얼리즘? 글쎄. 김훈의 작품을 별로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당대최고의 산문가라는 평에 약간은 반발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이라면, 이순신은 어린 시절, “존경하는 인물”의 후보들 가운데 한명이었을 것이다. 그가 원균의 모함을 받고, 백의 종군을 하고, 몇몇 대첩에서 크게 승리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그가 지었다는 유명한 시조, 그가 삶을 거두면서 한 얘기 정도의 조각들은 이른바 상식일 것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백의 종군을 해서, 종묘사직을 지켜내는 그 충의! 거북선이라는 인류최초의 철갑선을 발명한 희대의 지장! 죽음에 이르러서도 혹여 자신의 죽음이 전쟁에 영향을 미칠까 자신의 죽음을 감추는, 대의를 위한 그 희생 정신!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왜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무인! 그는 바로 영웅의 전형이었다.
어느 나라에나 위대한 정복자라든가 숭고한 방어자와 같은 국가적 민족적 영웅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영웅들이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사실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영웅은 비극적으로 스러져가고 없어도, 그의 영웅담은 계속 재생산되면서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영웅의 일대기를 역사로 본다면, 영웅이 일대기가 그 도구적 역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도리어, 역사가 그 도구적 역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이 확립된 이래로, 역사는 상아탑의 학문이 아니라, 역사가 개인의 감정이나 정치적인 도구의 산물로서 해석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오랜 군사 독재가 지배하던 시절의 영웅 이순신에는, 어떤 불순한 의도가 섞여있으리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충의정신, 얼마나 전근대적인가. 그의 희생정신은 파쇼에의 의심마저 들게한다. 거북선이 실제로는 이순신이 창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조차도 없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이러한 낡은 정신들이나 인식은 철이 들면서 기꺼이 버렸지만,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영웅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각인되어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영웅을 둘러싸고 있는 정신들은 완전히 지워진 것이 아니라, 내 무의식 중에서 그 본연의 목적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귀의 도청장치”랄까.

정치가나 독재자가 역사 속의 영웅을 적절하게 해석하고 변용하여 모종의 목적을 이루어 내려는 것처럼, 작가도 글을 쓰는 목적이 있고, 문학작품 속의 허구적 인물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역사가 아닌 문학이, 역사가가 아닌 김훈이라는 작가가 얘기하는 영웅 이순신은 어떤가를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김훈의 이순신은 임금이나 다른 장수들의 무능함,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맞서고, 필요할 때는 타협하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다. 그는 군기를 어긴 자는 엄하게 다스려 곤장을 치고 목을 베나, 아들의 마지막 순간을 얘기해달라고 청하며 슬퍼하는, 엄격한 아버지이자, 동시에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여진이라는 한 여자에 대한 욕과 정을 동시에 지닌, 그는 한 인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김훈의 이순신은 전근대에 살고 있는 현대적 인물이다. 그는 잘 나가는 기업의 중역 정도의 캐릭터를 맡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다.
김훈의 이순신은 자신의 무능력함에 고뇌하면서도, 때로는 투쟁하면서, 때로는 타협하면서 세상을 헤쳐가는 인간형을 나타낸다.
임금이나 원균, 명의 수군 총병관 진린과의 거듭되는 정치적인 게임에서도 이순신의 그러한 면을 잘볼 수 있다. 세상은 그가 원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지만, 그는 적절하게 투쟁하거나 타협함으로써 그가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이러한 정치 게임도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이순신의 인간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이순신이 그와 정분이 있던 여진의 시체를 발견하지만, “내다 버려라.”라고 명령하는 장면과 이 때 그의 심정이 아닐까. 그는 여진의 죽음앞에서 성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며,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한편, 어린 시절 알고 있던 이순신의 영웅성에 비해,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칼의 노래”를 읽는 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들의 찬란함에 가려진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 같달까. 이순신의 인간적임은, 그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의 인간적임과 어우러져 묘한 여운을 준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탈영하다가 붙잡힌 군관의 자기 여자를 살려달라는 애원 앞에 선 이순신의 모습을 보자. 이순신은 그 군관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는 신 또는 영웅의 위치에 있다. 하지만, 곧바로 형 집행을 명령하는 장면과 애원대로 그 여자를 놓아주는 장면 사이에 있는 여운은, 노골적인 찬사보다도, 이순신의 인간성을 훨씬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영웅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 보통 사람보다 싸움을 잘한다거나, 불사의 몸을 가졌다거나,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바로 영웅을 영웅으로 기억해주는 사람들의 가치나 생각을 반영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훈의 이순신은 김훈의 영웅이자, 김훈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영웅으로서 제시해주고 싶었던 이순신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가 삶의 고통이라는 질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세상의 끝이……이처럼……가볍고……또…….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칼의 노래”는 이 마지막 독백을 통해 죽음을 앞둔 영웅이, 아니 한 인간이, 어떤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은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이라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고뇌하며, 진중한 영웅의 삶을 살았으나, 결국 죽음의 앞 – 세상의 끝에서는 모든 것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너무나 진부하지만 역시 참일 수 밖에 없는 삶의 진리가 아닐까.

덧붙임: 위의 글은 “문학의 이해” 강의 숙제로서, 가능한 한 “무난하게” 쓰려고 노력한 것이지만,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주제를, 이순신이라는 대중적인 소재와 결합한, 베스트셀러용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김훈 씨 자신도, 자신은 밥벌이를 위해 글을 쓴다고 했으니, 대단히 예의에 어긋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 결합 자체가 도발적이었는가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있어, 결코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추천하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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