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헌법과 인권의 역사, 장호순 지음, 개마고원
우리가 현재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고 있는 기본권의 혜택들이, 실은 20세기 초에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대한민국이 근대적인 헌법을 기초한 것은 1948년의 일이고, 사회적인 논의나 합의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헌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 미국이나 유럽의 정치사를 접할 기회가 많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나만 해도,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도 역사 과목이라고는 ‘국사’ 밖에 없었으며, 공과대학이었던 대학교에서도 ‘한국 근현대사’, ‘정치학’ 정도 수준이 다였기 때문이다.
‘정치학’ 수업에서 본 비디오를 통해 막연히, 영국이나 미국은 오랜 민주주의의 전통을 가진 정치 선진국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이러한 이미지가 깨어지기 시작한 것은, ‘포레스트 검프’나 ‘미시시피 버닝’, ‘말콤 X’ 등의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된, 남북전쟁 이후에도 지속된 백인들의 강력한 유색 인종 차별이었다. 여성투표권이 주어진 것도 20세기의 일이라는 것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렇다면, 20세기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미국 시민들은 현재와 같은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미국의 사법제도를 다룬 글이나 책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을 통해 약간씩은 알게 되었지만, 미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질문에 초점이 맞춰진 이 책을 가벼운 마음으로 고르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의 지위에 해당하는 미국의 최고 사법 기구인 연방대법원들의 주요한 판례를 중심으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고 있는 권리들, 또는 현재도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슈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논의가 되고 결정되어 왔는가를 읽기 좋게 분야 별로 정리해놓았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역시 오랜 민주주의의 전통을 가진 나라 답게, 헌법을 초안한 국부들의 생각을 존중해, 어떤 헌법 조항이 애매할 경우, 학자들에게 그 조항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왔는지 조사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1948년과 1987년의 ‘주어진’ 헌법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다.
연방대법원은 이러한 헌법에 비추어 해석을 할 가치가 있을 경우에만 사안을 받아들이는데, 미국은 대한민국과는 달리 판례중심주의이고, 이에 따라 연방대법원도 기존의 판례들에 벗어나지 않고, 일관성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며 보수적인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기존의 판례를 뒤엎고 새롭게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해석을 내놓은 사례들이 많이 등장한다.
상식적으로, 사법의 과정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과 독립적으로, 판례 (또는 법 조항의 해석)의 일관성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실제로도 미국의 법조계는 그러한 점들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의 평등권 문제나, 노동시간 제한 등과 같은 당연해 보이는 문제도, 그러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연방대법원의 판단은 180도로 달라졌다는 것을 우리는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결국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법의 적용도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일이 자주 일어나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일어나서도 안될 것이다. 다만, 기존 법이나 판례 등을 지키는 것만이 중요하지는 않다는 보수주의자를 일깨우는 교훈일 것이다.
판례의 일관성을 깨는 일은 당시의 사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기득권 세력으로부터도 많은 비난을 받는다. 그로부터 수십년 후에 태어난 우리는 그러한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러한 결정을 하는 시점에서 어떤 결정이 역사적으로 올바른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올바른 결정을 하기 위한 사법 시스템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환경과 조건이 필요할까? 미국의 국부들에 의해 쓰여진 국가의 철학, 이를 지켜나가는 것을 전통으로 확립하기 위한 역사, 도그마와 무관하게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해 올바른 방향을 찾아나갈 수 있는 민주주의의 문화 모두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각각의 사안에 대해서, 사회적 분위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측면, 정치, 경제적인 사건들도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어서,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읽기가 매우 편리했다.
다음 번에는 미국의 현대사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