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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ksonomy

Folksonomy란 social classification 또는 collaborative categorization이라고 얘기되는 인터넷 어플리케이션의 형태를 가리키는 일종의 buzzword입니다.Flickrdel.icio.us의 태깅(tagging)기능을 사용해보신 분이라면 아실겁니다.

드보락 아저씨는 이를 엄청나게 비판합니다. 결론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논지는 대략,

  • 원래부터 있던, 새로울 것이 없는 아이디어다.
  • 스팸(spam)과 파괴행위(vandalism)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하다는 이상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Wired와 몇몇 유명한 블로거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보이고 있군요.

원래부터 있던 기술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닐 듯 합니다. 기술은 항상 끊김없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기존에 있던 아이디어들이 환경이나 기술등의 제약에 부딪히고, 또 그것을 헤쳐나가는 방식으로 발전하는 기술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Folksonomy도 기원을 찾으라면 충분히 찾을 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편리한 시스템을 가지게 된 것은 분명히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은 오랜 역사를 가진 개념이지만, 세계를 편리하게 이어주는 증권 시장 시스템이 없었다면 증권 시장이 과연 오늘날과 같은 특성을 보일까요?

정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하지 않을까요? 위키피디아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위키피디아는 "Given enough eyes, …"라는 Linus’ Law를 기반 아이디어로 훌륭하게 컨텐츠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즉,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스팸이나 파괴행위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거죠. 설령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은 선한 것 같습니다. Folksonomy의 스팸 또는 파괴행위 문제도 앞으로 해결해야할 기술적 과제일 뿐이고,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social" 접두어를 가진 최근의 기술들은 한가지 성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용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해관계가 결집되어서 새로운 어플리케이션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예견되었을 법한 일이죠. 인터넷 자체가 복잡 시스템(Complex system)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social application들도 이러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는 단순히 물건을 사러 혹은 물건을 팔러 시장에 나가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시장의 독특한 성질이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래서, 우리는 시장에 가면, 단순히 물건만 살 수 있는게 아니라, 서로 흥정을 해서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기도 하고, 여러가지 볼 거리도 구경할 수 있는거지요.

드보락 아저씨는 Folksonomy를 블로거들의 마지막 희망(bloggers’ last hope of invention)이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이라는 플랫폼에서,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창발성(emergence)을 이용하는 어플리케이션은 분명 엄청나게 많이 있을겁니다. 이러한 어플리케이션들은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에는 꿈꿀 수 없었지만 사용자들은 분명히 원하는 그런 종류의 것들일겁니다. 드보락 아저씨는 분명히 미래를 잘못 짚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블로그의 시대에 살고 있는 저널리스트인 드보락 아저씨는 Disruptive Technology의 가장 직접적인 희생양일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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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황우석을 바라보는 일관된 방법
http://yeinz.pe.kr/blog/index.php?page=3
황교수 논문 있는그대로 보기!
http://goodking.new21.net/bbs/rgboard/view.php?&bbs_id=0002&page=&doc_num=400
과학기술의 덫에 갇힌 언론
http://www.greenreview.co.kr/archive/80KangYanggu.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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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플에 불여우 설치하기

요즘 들어 휴강이 많아져서, 월/수요일 같은 경우에는 4시간 가량의 공백이 생긴다. 과 전산실에서 웹브라우징을 하는데, 탭브라우징을 지원하는 불여우(Firefox)를 사용하다가 IE를 사용하려니 너무 불편했다. 과 전살실의 컴퓨터에서는 일반 사용자가 프로그램을 설치할 권한이 없다. 문득 USB 드라이브에 불여우를 설치해서 사용한단 얘기가 생각나서 셔플(Shuffle)에 설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USB 드라이브에 불여우를 설치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는 것 같았다. PC의 불여우 설치본을 그대로 복사하는 방법USB 드라이브에 설치하는 용도로 따로 만들어진 패키지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나는 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이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1. 그냥 PC의 불여우 디렉토리를 그대로 셔플에 복사하고,
  2. 불여우의 프로파일 디렉토리도 복사한 다음,
  3. 불여우를 실행할 때 프로파일 디렉토리를 지정해주는 배치 파일 하나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난 프로파일 디렉토리를 복사하지 않고, 그냥 빈 디렉토리만 만들어주고 배치 파일에 그 상대 경로를 넣어주었다. 아무 문제 없이 디폴트 프로파일이 생성되었다.

역시 탭브라우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니, 웹브라우징이 훨씬 편리했다.

한가지 문제는, USB 드라이브 상의 불여우의 정보 – 북마크를 어떻게 PC와 Sync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회사와 집 두군데에 정보를 분산해놓는 문제와 같은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한 내 해결책은 인터넷 상에 정보를 두는 것이었고,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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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efox extension: SessionSaver and Adblock

SessionSaverAdblock은 최근에 쓰기 시작한 Firefox extension입니다.

뉴스 사이트에서 읽을 거리를 탭으로 먼저 열어놓은 다음 하나씩 읽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Firefox를 닫아야만 하는 상황일 때, 남아있는 탭은 골칫거리입니다. Firefox의 시작 페이지 기능을 (시작페이지를 현재 페이지를 설정하면 모든 탭이 저장되죠.) 사용해보기도 하고, 북마크로 일일이 저장해주는 방법도 사용했었습니다만,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SessionSaver는 Firefox를 닫을 때 자동으로 탭들을 저장해주고, 다음에 Firefox를 시작할 때 복구해줍니다. 특히 여러 Firefox 인스턴스가 떠 있을 때, 윈도우를 종료하더라도, Firefox를 띄우면 원래대로 복구되더군요. 여기에 더해서 현재 세션(탭 상태)을 따로 저장하거나 저장된 세션을 간편하게 복구할 수도 있습니다.

Adblock인터넷 한겨레가 개편되면서 많아진 Flash 광고를 제거하기 위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IE에서 보면 Flash 위치가 제대로인데, Firefox에서 이상한 위치에 나타나는 경우가 여러 사이트에서 종종 보이더군요.) URL의 패턴을 사용해서 이미지나 링크 등을 막을 수 있습니다. 특히, 페이지 상의 Flash에 마우스를 갖다대면, 그 옆에 “Adblock” 이라는 버튼이 나와서, 패턴을 사용하지 않고도 바로바로 막을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편리하고 유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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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와 악마

“문학의 이해” 수업 시간에 전봉관 교수님(황금광시대의 저자)이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구조 분석에 관한 얘기를 잠깐 언급하셨다. 간단히 말해서, 욕망의 대상으로의 욕망은 욕망의 매개와의 관계 속에서만 형성된다는 얘기다. “삼각형”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구조주의 쪽의 사상으로 보인다. 과학적 근거가 제대로 있는지는 궁금하지만, 일변 설득력이 있는 흥미로운 얘기다.
제프리 버튼 러셀의 “악마의 문화사”라는 책도 언급하셨다. 이 책의 저자는 악의 이해를 통해서, 선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하느님이 악마를 창조한 것은 하느님의 전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중, 아퀴나스의 설명을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단다. 그 설명이란, 하느님이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 인간의 상대성이 선과 악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난 중세철학을 폄하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무지로부터 나온 것인 듯 하다. 공부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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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업과 상아탑

80년대초 전산실 근무당시 일본NEC 직원이 TV(?) 한대를 가져와
“이게 PC라는건데 10수년후에는 동내 수퍼마켓에도 이걸 쓸거다.”
라면서 자랑했다. 당시 같이근무한 프로그래머들 조차 “아니 그럼
프로그램은 누가 짜서 그걸 돌려 말도않되..”라고 했던 기억이난다.

이상직님삼보 컴퓨터 (2005/5/19 목)에서 발췌

당시에 전산실에서는 PC가 완전히 듣도보도못한 기술이었겠지만 지금 듣고 있는 시스템 엔지니어링 클래스에서 들은 바로는 그 당시 우리나라 연구기관에서도 IBM 칩과 PCDOS를 가져다가 PC를 개발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브로드밴드 보급률로 유명해진 것은 얼마되지 않았지만, 시스템 엔지니어링 클래스를 가르치시는 전길남 교수님은 1980년대부터 국내 인터넷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그 외에도 ETRI에 의한 TDX라든가 CDMA 기술의 개발도 우리나라에 보편화되기 훨씬 전부터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었다. 요즘 한창 얘기가 많이 나오는 3G나 DMB 기술도 마찬가지다. 전길남 교수님의 랩에서는 수년 후에나 보편화될 가능성이 있는 람다 네트워킹(lambda networking)을 연구하고 있단다.

회사에 다니다보면, 또는 기술에 관련된 웹사이트를 돌아다니다보면,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대의 기술들을 허겁지겁 따라가는 모양새가 문득 눈에 띈다. 반면에, 대학 연구실이나 연구소 사람들은 10년 후에나 보통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는 것(물론, 어떤 것들은 아예 볼 일이 없게되겠지만)을 연구한다.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이겠지만, 회사를 다니다가 복학해서 그 두가지 광경을 직접 보고 있노라니, 상아탑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살짝 부러운 생각도 든다. 단지, 자신의 생존 조건과 격리된 학문에 대한 어설픈 동경인가. 글쎄.

10년 후에나 보편화될 기술을 연구한다는 것은, 10년 후의 시스템의 초기조건을 형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초기조건에 민감하다. 자신의 밈(meme)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넓을 수록, 그리고 그 영향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될 수록 가치있어 보이는 것, 일변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현업에서도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란 법은 없다. 10년 단위는 아니더라도 신기술을 만들어내는 3-5년 단위의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대규모의 회사라면 쉽게 볼 수 있고, 그들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때로 어마어마하다. (예를 들어, 발매되지도 않은 XBOX 360, PS3에 대한 최근의 열풍을 보라.) 따라서, 현업과 상아탑이라는 이분법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기술을 소비하기만 한다. 특정 분야에서 어느 정도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생산한 기술을 소비하면서 또 다른 기술과 가치를 창출한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을 생산해낸다. 이러한 기술 생산과 소비의 (양적이기보다는) 질적인 차이에 따라 생산 위주의 계층으로부터 소비 위주의 계층이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현실에 적합할까.

그렇다면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난 이들 계층 중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디에 위치하기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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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꿈

나는 친구와 함께 언덕과 산들로 둘러싸인 녹초지를 걷고 있었다. 매우 외딴 곳이어서, 우리는 겨우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었고, 운전사 양반은 넉살이 좋아보였다.

언덕을 둘 셋 정도 넘었을까, 우리의 시야에는 강이 들어왔고 (강이라기보다는 바다 같기도 하고), 길은 강의 얕은 목을 가로질러 뚫려있었다. 강바닥에는 모래질의 흙이 투명하게 비쳤고, 마침 해가 질 무렵이라, 강(바다?) 저편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친구도 운전사도 그러한 경치에 경탄하고 있었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강을 건너고나서 바로 곁에 있는 높은 언덕에는 커다란 장원이 보였고, 우리는 경치도 구경할 겸해서 쉬어가기로 했다. 그 장원에는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뒷뜰의 텃밭 정도임직한 곳을 발견했다.

그 밭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났고, 처음에는 봄철의 작물을 심기 위해 거름을 뿌려놓은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반쯤 썩은 수백구의 시체들이 뒤섞여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친구를 바라보았고, 또 운전사 양반을 바라보았는데, 내 상상인지 진실인지 몰라도, 그 운전사의 표정은 그 장원의 사연에 깊게 관여한 자의 것이었다. 모르는 체 우리를 꾀어 여기까지 데려온 것인가?

팔다리가 서로 뒤엉키고 살점이 반쯤 썩고 뼈가 들어난 시체들 사이에는 갓태어난 듯한 아이의 머리통도 뒤섞여있었다. 나의 머리속은 새하얗게 되어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운전사는 곁에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갑자기, 아이의 머리통이 (시체가?) 울음소리를 내면서 시체 무덤을 헤치고 튀어나왔다. 마치 시체로부터 살아있는 아이가 태어나는 듯이.

모든 게 깜깜해지며 빙글빙글 돌았고, 나는 잠을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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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ckr + 문근영




문근영

Originally uploaded by Joseph Jang.

다른 분들의 Flickr 앨범만 보았을 땐, 단순히 Flash와 DHTML 기술을 활용한, 멋진 인터페이스에만 감탄을 했었는데요. 직접 사용해보니, 더욱 멋진 웹 어플리케이션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일단, 계정을 등록하고, 바로 업로드 툴을 다운받아 사용해 보았습니다. 간단하면서도 편리해서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드래그앤드랍(drag & drop)을 통한 포토셋(photoset)의 생성과정은 너무나 친근하더군요. (어딜 가나 batch 모드를 빠뜨리지 않는 친절함도요.)
가장 멋진 기능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기능, 바로 다른 블로그 어플리케이션과 (각 블로그 어플리케이션 별, API를 사용하여) 연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flickr 사이트에서 블로깅 중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발자들이 꿈꾸는 상호 연동되는 웹서비스의 미래가 아닐까요?

당분간 flickr를 애용해주어야 겠습니다.

제 앨범이랑, 포토셋, 그 슬라이드 쇼도 감상해보시죠.
http://www.flickr.com/photos/josephjang/
http://www.flickr.com/photos/josephjang/sets/347410/
http://www.flickr.com/photos/josephjang/sets/347410/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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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사대주의 비판" 유행에 대한 비판

likejazz.COM에 달았던 comment덕에 받은 comment.

한가지만.

우리말로 할 수 있는 표현은 가급적이면 우리말을 사용하면 어떨까요?
http://www.likejazz.com/29458.html

내가 영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 사대주의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완전히 실용적인 이유 – 가볍게 적는 글에 번역의 비용을 들이기는 부담스러운 이유라든가, 원문의 글을 오해 없이 옮기거나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이유라든가, 하루에 접하는 언어의 양이 한국어보다도 영어가 더 많다든가 하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likejazz에서 뿐만 아니라, 이오덕 선생의 언어사대주의에 관한 글을 많이 링크하는 것을 보게되었다. 내 주변의 엔지니어들 중에는 말을 할 때도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은데, 언어사대주의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위에 적은 것과 유사한 순전히 실리적인 목적이다. 실제로 사대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에게 저러한 글을 링크해주는 것은 거의 인신공격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언어사대주의나 순전히 과시욕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언어 사대주의를 내세우는 방식보다는 우리말 사용의 실리나, 한국 문화의 발전 또는 정체성 확립과 같은 이유를 통해 합리적으로 설득을 하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올바른(?) 우리말 사용의 확산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그 같은 이유로 나를 설득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말이다.

한가지, 영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글을 쓴 사람을 포함하여) 독자가 글을 읽게 힘들게 만드는 것은 인정한다. 이러한 면에서, 한영 병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 된다고 생각한다. 문화적 정체성 운운은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문화의 다양성에는 동의하지만, 특정한 문화를 무조건 수용하라는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영어공용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지처럼, 내게 언어는 “한낱 연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전에, 그에 대한 유행하고 있는 생각을 비판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아무 경우에나 사용하는 경향을 너무나도 자주 본다. 블로그가 유행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더욱 세세하게 볼 수 있게 되면서 이러한 현상을 더욱 자주 볼 수 있는 것 같다. 요즘 유행하는 “언어 사대주의”의 비판도 이러한 경향 중의 하나가 아닐까?

무엇이 옳든 간에,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는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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